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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예산권', 사실은 대통령이 쥐고 있다?: 예산 집행의 숨겨진 권력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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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는 사람노해인 · 진행 / 차우진 ·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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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갑의 권력"에 관한 오래된 착각

민주주의 체제에서 '지갑의 권력(Power of the Purse)'은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보유한 가장 강력하고도 최후의 보루로 여겨져 왔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이 "행정부의 독주를 막을 가장 완전하고 효과적인 무기"라고 칭송했던 이 권한은, 국회가 예산안을 확정하는 순간 그 소명을 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최근 시카고 대학교의 케빈 J. 앤젤(Kevin J. Angell)이 발표한 연구는 우리가 믿어온 권력 분립의 공식에 균열을 냅니다. 예산은 국회에서 '통과'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돈이 나가는 '집행'이라는 제2의 전장에서, 대통령은 의회의 눈을 피해 예산의 흐름을 자신의 의도대로 재편하는 '보이지 않는 혁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2. 첫 번째 발견: '30센트의 법칙' — 대통령의 목소리는 법보다 끈질기다

대통령이 국회에 제출하는 예산 요청서(Budget Request)는 흔히 단순한 '희망 사항'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국회가 예산을 심의하며 이를 대폭 수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앤젤의 연구는 놀라운 수치를 제시합니다. 국회가 확정한 예산 규모와는 별개로, 대통령의 당초 요청액이 실제 지출에 막강한 '가산적(Additive)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Controlling for Congress’s budget, I estimate that spending changes by thirty cents for every dollar change in a presidential budget request."

분석에 따르면 국회 예산이 고정된 상태에서도, 대통령이 1달러를 더 요청하거나 덜 요청했다면 실제 지출액은 그 방향으로 약 30센트가량 변동되었습니다. 이는 예산권이 국회에서 결정되는 단판 승부가 아니라, 대통령이 집행 단계에서 승기를 잡는 '2단계 게임'임을 시사합니다. 특히 이 현상이 대통령의 단순한 '예측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대통령 교체기(Transition years)' 데이터를 통해 증명됩니다. 전임자의 예산을 집행해야 하는 취임 첫해에는 이러한 영향력이 마법처럼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3. 두 번째 발견: '비대칭적 권력' — 지출을 늘리기는 중죄지만, 막기는 쉽다

대통령의 예산 집행권은 '정치적 비대칭성'이라는 독특한 특징을 가집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통령은 예산을 더 쓰는 것은 극도로 어려워하지만, 덜 쓰는 것에는 압도적인 권한을 행사합니다. 이러한 불균형의 핵심은 법적 리스크의 차이에 있습니다.

초과 지출(Overspending): 안티-데피션시 법(Anti-Deficiency Act, ADA)에 따르면 국회 승인 없이 예산을 초과 지출하는 것은 형사 처벌이 가능한 중죄(Felony)입니다. 관료들에게 이는 '커리어를 건 도박'과 같습니다.

과소 지출(Underspending): 반면, 예산을 다 쓰지 않는 것은 감시가 어렵고 형사 처벌 규정도 없습니다. 대통령은 이를 통해 자신이 선호하지 않는 사업을 고사시키는 '사후적 거부권(Ex post veto)'을 행사합니다.

리처드 닉슨의 복지 예산 집행 거부나 도널드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금 보류 사례는 이러한 '조용한 거부'가 얼마나 강력한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4. 세 번째 발견: 1974년의 개혁은 왜 실패했는가?

1970년대 닉슨 대통령의 독단적인 예산 집행 거부(Impoundment)에 분노한 국회는 1974년 '예산 및 임파운드먼트 통제법(ICA)'을 통과시키며 대통령의 손발을 묶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법적 제약은 대통령의 권한을 없애는 대신, 더 정교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진화시켰습니다.

오늘날 대통령들은 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대신 '관료적 마찰(Bureaucratic friction)'을 활용합니다.

해당 사업의 인력 채용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켜 집행 역량을 떨어뜨립니다.

복잡한 서류 작업이나 추가 검토 절차를 만들어 지출의 속도를 늦춥니다.

보조금 지급 기관의 경우, 기존 보조금을 취소하거나 신규 지급을 보류하는 방식으로 예산을 묶어둡니다.

이러한 수단들은 '관리 효율화'라는 행정적 명분 뒤에 숨어, 1970년대의 개혁을 무력화하며 대통령의 재량권을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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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네 번째 발견: '정치화된 기관'이 대통령의 무기가 될 때

대통령의 예산 통제력은 모든 부처에서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핵심은 부처 내 '정치적 임명직(Political Appointees)'의 비중입니다. 앤젤의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임명직이 많은 부처일수록 대통령의 예산 기조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대통령의 충성파들이 포진한 부처는 명시적인 명령 없이도 대통령의 예산 요청서에 담긴 신호를 포착하여 집행 현장에 즉각 반영합니다. 특히 보조금을 지급하는 기관(Grant-making agencies)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대통령이 '정치화된 조달'을 통해 자신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거나 반대파를 압박하는 정교한 통치 수단을 쥐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6. 다섯 번째 발견: 당파성에 따른 차이 — 누가 더 빈번하게 사용하는가?

이러한 집행권의 행사에는 당파적 색채도 묻어납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대통령 모두 이 권한을 활용하지만, '과소 지출 권력'을 더 빈번하게 사용하는 쪽은 공화당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공화당 대통령은 민주당 대통령보다 예산 미집행(Underspending)을 약 2.6%포인트 더 많이 유도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정부 지출 감소와 재정 보수주의를 중시하는 공화당의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이, '덜 쓰는 것은 쉽고 더 쓰는 것은 어려운' 예산 집행의 제도적 특성과 맞물린 결과입니다. 공화당 대통령들에게 예산 집행 재량권은 '작은 정부'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됩니다.

red, republic vs. blue democra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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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무너진 견제와 균형, '비대칭적 약속'의 함정

우리는 그동안 국회가 예산을 확정하면 정책 결정이 종료된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대통령은 집행이라는 제2의 단계를 통해 의회의 결정을 자신의 뜻대로 뒤트는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대칭적 약속 문제(Asymmetric commitment problem)'를 야기합니다. 대통령은 의회와의 협상에서 지출을 약속하고도 집행 과정에서 이를 어길 수 있지만, 지출을 줄이겠다는 약속은 제도적으로 훨씬 더 강력하게 이행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양당 간의 협상을 방해하고 입법부의 권위를 실질적으로 훼손합니다.

국회가 쥐고 있다고 믿었던 지갑의 끈이 사실 대통령의 손에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예산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집행의 투명성을 높이고 행정부의 자의적 불집행을 견제할 새로운 제도적 설계에 대한 고민이 시급합니다.

Source: Kevin J. Angell, Who Has the Power of the Purse? Presidential Influence

Over Spending Through Budget Implementation, Univ of Chicago, Aug 16,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