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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조선의 재발견: '민족'과 '유교'에 관한 4가지 반직관적 진실
필자 Econ Blog_K의 공개 원문을 허락받아 자동 수집했습니다. 문장과 이미지 순서를 보존하고 지면 폭만 조정했습니다.

1. "민족의식은 근대 서구의 선물일까?"
오늘날 현대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민족주의'나 '집단 정체성'은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인쇄 자본주의' 이론이나 어니스트 겔너(Ernest Gellner)의 주장에서 보듯, 19세기 근대화와 서구 문물의 도입 이후에야 생성된 인위적 관념이라는 통념이 지배적입니다. 즉, 근대 이전의 민중에게는 국가나 민족 단위의 공통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근대 사회는 단지 신분으로 파편화된 개별 집단들의 집합체에 불과했다는 시각입니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사회를 돌아보면 이러한 서구 중심적 근대론은 중요한 역사적 질문에 부딪힙니다. 조선은 중앙 집권적 관료제와 장기간의 사회적 지속성을 고도로 유지해 온 국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이미 전근대 시기부터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된 동질적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조선시대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주고받은 언어적 수사, 그리고 피지배층이 유교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한 방식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상식처럼 믿어왔던 조선 사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반직관적 진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조선인들의 자기 인식, 용어 사용의 변천, 그리고 피지배층이 유교 이데올로기를 무기 삼아 자신의 권리를 쟁취해 간 4가지 핵심 통찰을 소개합니다.
2. 조선 사회를 재해석하는 4가지 핵심 통찰
Point 1. '단일 혈통'이 아니다: 조선의 백성 규정 '오민(吾民)'의 반전
조선 건국 후 지배층은 타 정치세력이나 외부 집단과의 경계를 다질 때 '아족(我族)'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 용어는 명나라나 북방 야인, 왜인 등 외부 세계와 조선을 구분 짓는 데 쓰였을 뿐만 아니라, 족보나 문집(예: 『금릉김씨세고발』, 『의성김씨천상각파편』)에서 특정 가문이 자신들의 역사성과 문벌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폐쇄적·위계적 용어로도 자주 활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아족'이라는 표현이 조선인 전체를 하나의 혈통적 종족 집단으로 품어 안는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반면, 국가가 책임져야 할 신민 전체를 지칭할 때 지배층이 사용한 핵심 언어는 바로 '오민(吾民)'이었습니다. '오민'은 지배층이 자신들의 피통치 대상을 타 집단 구성원과 구별하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정치적·도덕적 의무와 포용성을 드러내는 국가적 용어였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오민'이 혈통이나 인종에 국한된 배타적 개념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중종 14년, 귀화한 북방 야인의 처우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특진관 이장곤(李長坤)은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방금 아뢴 귀화한 사람들의 일은, 경성(鏡城), 북청(北靑) 등의 고을에서 귀화한 사람들은 지금 우리 백성(吾民)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처럼 혈통과 종족이 다른 북방 야인이라도 조선의 통치 체제 안으로 들어와 신민이 되면 기꺼이 '오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단일 혈통의 원초적 단일 민족' 관념과 조선의 집단 정체성이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조선의 국가 성원 인지 방식은 혈통적 배타성이 아니라, 국가의 신민이라는 정치·사회적 테두리 안에서 작동한 포용적 개념이었습니다.
Point 2. 신분을 뛰어넘는 운명 공동체 선언: '동포(同胞)'라는 언어적 장치
15세기 이후 장재의 「서명(西銘)」에 등장하는 "민오동포(民吾同胞, 백성은 나의 동포)"라는 구절이 인용되기 시작하면서, '동포(同胞)'라는 단어는 조선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내부 동질성을 확인하는 강력한 언어적 수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배층은 '동포'라는 표현을 통해 신분 고하와 직역의 귀천을 초월하여 모든 구성원이 국가와 운명을 함께하는 동일체임을 공표했습니다. 중종 34년 이언적(李彦迪)은 백성에 대한 관대한 정치를 주장하며 심지어 정부의 억불 정책으로 거주할 사찰을 잃은 승려들까지도 국왕이 포용해야 할 백성이자 '동포'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천대받던 승려조차 국가의 성원으로 묶어 세우려 한 것입니다.
또한 숙종은 평안도에 대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백성들을 "아동포지민(我同胞之民, 나의 동포인 백성)"이라 부르며 이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자신을 질책했습니다. 나아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고종후(高從厚)는 전라도민들에게 보내는 격문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우리 道의 모든 어른들이여, 누군들 한 동포로서 단에 올라 피를 찍어 바르는 맹세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고종후는 신분과 지역을 넘어 백성 모두가 '동포'라는 하나의 개념적 집합체에 속해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지배층이 장기간에 걸쳐 사용한 '동포'라는 언어적 장치는 피지배층에게도 깊이 전달되어, 강고한 신분제 속에서도 자신들이 국가 중심의 공동 운명체에 속해 있다는 내부 동질성과 집단 의식을 싹틔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Point 3. 백성은 수동적 피통치자가 아니었다: '삼년상(三年喪)'을 통한 권리 쟁취
성리학적 질서를 도입한 조선 조정은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을 통해 의례의 차별성을 공식화했습니다. 이 법전에는 두 가지 커다란 법적 장벽이 존재했습니다. 첫째는 성별 차별로, 부친이 생존해 있을 경우 모친상 기한을 15개월(거상)로 제한한 것입니다. 둘째는 신분 차별로, 일반 백성인 서인(庶人)과 군사(軍士)의 상기를 100일로 제한한 것이었습니다. 초기 사족(양반) 관료들은 비사족 집단이 삼년상을 치르려 하면 "군역과 조세를 피하기 위한 기만 행위(피역)"라며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피지배층 백성들과 여성들은 수동적으로 100일 상기나 성별 제한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효(天下之通喪)"라는 유교적 절대 명분을 무기 삼아 자발적으로 삼년상을 이행하고 국가에 정표(旌表)를 요구하며 법적 한계를 뚫어냈습니다.
여흥 사람 변종생(卞種生)은 13세에 어머니를 잃었을 때 부친이 생존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묘 옆에서 3년상을 치렀고,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다시 3년상을 마쳤습니다. 법전의 성별 차별 규정을 넘어서는 행위였지만, 조정은 그녀의 효성을 인정하여 정표를 내렸습니다.
또한 서인 김인순(金仁順)은 어릴 적 모친상을 당해 삼년상을 치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성인이 된 후 부친상을 3년으로 마친 뒤 사후에 모친의 삼년복상을 추가로 치렀습니다. 신분적 100일 제한을 뛰어넘은 이 사례에 대해 경기관찰사 임백령은 법전의 제약보다 유교적 효의 가치를 우선시하며 조정에 정문과 복호의 포상을 청했습니다.
조정 내부에서는 최숙생, 정광필 등 관료들이 「경국대전」의 신분별 규정을 고수하려 했으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삼년상을 치르고 효를 이행하자 이를 거부할 명분을 잃었습니다. 결국 조정의 중론은 신분을 막론하고 삼년상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습니다. 피지배층은 유교적 의례를 주체적으로 향유함으로써, "국가 가치에 부합할 경우 신분적 차별을 넘어 양반과 대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권리의식을 깨달았고 국가의 법적·정치적 합의까지 바꿔놓았습니다.
Point 4. 특권을 향한 비양반들의 적극적 침투: '향교(鄕校)' 출입과 피역
조선 후기로 갈수록 관학 교육기관인 향교(鄕校)의 위상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양반 사족들이 자신들의 학문적·정치적 기반을 서원(書院)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공백이 된 향교를 소위 '잡류(雜類)'라 불린 비사족 집단이 점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사족 집단이 향교로 대거 진출한 핵심 이유 중 하나는 교생(校生)에게 주어지는 군역 면제(피역) 특권을 향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양반 사족들은 이를 두고 향교가 신분 질서를 어지럽히고 군역을 피하는 소굴로 전락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잡류와 자신들을 구별 짓기 위한 온갖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성리학을 통한 교화'를 국가의 핵심 이념으로 삼았던 조정으로서는 향교에 입학해 글을 읽겠다는 교생들의 특권을 함부로 박탈할 수 없었습니다. 정조 대에 이르기까지 향교를 통한 비양반층의 침투와 피역 현상은 지속되었습니다.
비사족 집단이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던 향교를 활용하여 군역 면제라는 실질적 특권을 획득한 현상은 단순한 군역 회피를 넘어섭니다. 이는 피지배층이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교 문화를 적극적으로 체득하고 활용함으로써, 국가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자신들의 지위와 권리를 확보하려 했던 주체적 움직임이었습니다.
3. "과거가 묻고, 현대가 답하다"
조선 시대의 역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학술적·사회학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전근대 조선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유교라는 공통의 문화와 행위 규준을 공유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해, 국가를 중심으로 한 확장된 집단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사회학자 앤서니 스미스(Anthony Smith)는 역사의 수동적 객체였던 민중이 권력과 문화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지면서 역사의 주체이자 '시민(citizens)'으로 변화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어니스트 겔너(Ernest Gellner)는 전근대 사회에서는 지배 엘리트가 민중을 통합할 포괄적 담론을 형성하지 못해 민족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나, 동아시아의 중국과 조선처럼 '상위 문화(유교)'가 단순한 종교적 신념을 넘어 도덕적 규준 및 국가 관료제와 밀접하게 결합된 사회에서는 전근대에도 독자적인 공동체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한국인의 집단 정체성과 민족 관념은 19세기 이후 서구 문물의 갑작스러운 도입이나 식민 지배라는 외부적 충격에 의해서만 급조된 근대의 부산물이 아닙니다. 조선이라는 국가 안에서 백성들이 유교 문화를 수용하고 권리를 쟁취해 온 장기간의 역사적 경험이 근대 한국 민족주의의 결정적 기원이 된 것입니다.
포스트를 마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져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느끼는 집단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리고 당대 지배층의 강요된 이데올로기로 여겨졌던 문화가, 어떻게 피지배층에게 자신의 지위와 권리를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을까요?"
과거 조선의 백성들이 보여준 주체적 삶의 궤적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정체성과 권리에 대한 깊은 지적 통찰을 선사합니다.
Source: 허준, 조선시대 국가정체성의 형성과 근대 '민족' 관념의 출현, 서강인문논총 60집,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