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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네즈의 사명과 현대 문명의 비극: 왜 우리는 '2순위 사회'를 지켜야 하는가?
필자 Econ Blog_K의 공개 원문을 허락받아 자동 수집했습니다. 문장과 이미지 순서를 보존하고 지면 폭만 조정했습니다.

1. 마요네즈 브랜드가 '지구 구하기'를 선언한 이유
헬만(Hellmann's) 마요네즈가 자사의 존재 이유를 단순히 "맛있는 마요네즈를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라, 남은 음식을 활용해 "음식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라는 거창한 사명 선언문(Mission Statement)으로 내걸었을 때 세상은 소소한 웃음거리로 삼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을 비롯한 언론들은 상품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못하고, 단순한 자본주의적 거래에 무언가 신성하고 고상한 목적을 덧씌워야만 정당화된다고 믿는 기업들의 반자본주의적 정서를 꼬집었다. 모기업 유니레버의 한 주요 주주 역시 "마요네즈의 사명을 정의하느라 본질을 잃어버렸다"며 거세게 비판했다.
하지만 토론토 대학교의 철학자 조셉 히스(Joseph Heath) 교수의 시각은 조금 달랐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나서는 평범한 직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는 꽤 훌륭한 인사 관리(HR) 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출근하며 "나는 오늘 유니레버의 이윤을 창출하러 간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지구의 음식 쓰레기를 줄이는 위대한 임무 수행 중이다"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높은 내재적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히스 교수 역시 출근길 도로 위에서 비슷한 자조적 상상을 하곤 한다. 기술적으로 철학과 교수의 직업은 학생들이 낸 등록금을 바탕으로 강의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월급을 받는 상업적 거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역시 가끔은 자신의 일에 조금 더 원대한 사명 선언문을 부여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예컨대 "매 강의마다 서구 문명의 기초를 재현(reproducing)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은 의문이 도출된다. 왜 현대 문명은 가만히 놓아두면 저절로 유지되는 자연스러운 체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설명하고 교육하지 않으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직관적이지 않은 체제가 되었을까? 왜 문명을 지탱하고 재현하는 일에는 이토록 번거로운 수고와 고상한 명분이 필요한 것일까?
2. 사상이 제도를 앞선 사회: 왜 현대 문명은 끊임없는 '설명'을 요구하는가
현대 사회가 이토록 끊임없는 설명과 교육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사상가 피에르 마낭(Pierre Manent)의 통찰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와 현대 문명의 결정적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현대 역사적 상황의 독특한 특징은 현대에 들어 정치적 사상과 정치적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정치사는 '아이디어'나 '교리'를 언급하지 않고도 서술될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는 당시의 '지적' 혹은 '문화적' 삶에 대해 단 한 페이지도 할애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는 철학, 특히 정치철학의 탄생지였음에도 그러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삶이라는 경험 '이후(after)'에 나왔다. 그러나 현대 정치철학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현대 정치철학은 실행되기 '이전(before)'에 구상되고 선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낭의 이 깊은 통찰은 현대 문명의 운명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던져준다.
첫째, 사상이 제도의 실현보다 앞섰기 때문에, 제도를 유지하고 재현하기 위해서는 그 바탕이 된 사상 역시 끊임없이 다음 세대에 재현되어야 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정치철학 원칙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제도 전체가 기능적 위기이자 대규모 정당성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둘째, 현대 정치 제도의 핵심 아이디어들은 결코 직관적이지 않다. 훈련받지 않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물학적·도덕적 본능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때마다 그 당위성을 매번 '설명'하고 설득해야만 한다.
이로 인해 현대 사회에는 두 가지 거대한 구조적 결과가 나타난다. 사회학적으로는 공식 교육 시스템이 사회의 핵심 제도적 구조로 자리 잡게 되며, 문화적으로는 이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인지적 엘리트(cognitive elites)'가 문명 재현의 필수적 연기자로 등극한다. 반면 공식 교육 시스템을 멀리까지 이수하지 못한 이들은 문명의 재현 과정에서 소외되는 서글픈 부작용을 겪게 된다.
3. 1순위의 유토피아와 2순위의 현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제도적 편법'
그렇다면 왜 현대 문명의 핵심 사상들은 그토록 설명하기 어렵고 직관에 반하는가? 히스 교수는 문명(civilization)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이 타고난 생물학적·도덕적 본능과 성향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거대한 협동 체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고안된 제도적 구조"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두 축, 즉 정치의 자유주의(Liberalism)와 경제의 자본주의(Capitalism)는 인간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1순위(First-best)' 이상형이 아니다. 인간의 정서적 본능 기준에서는 어디까지나 씁쓸하게 수용해야 하는 '2순위(Second-best)' 체제, 즉 일종의 '제도적 편법(Institutional kluges)'에 불과하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원하고 꿈꾸는 1순위 이상과,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타협으로 만들어낸 2순위 현실은 정치와 경제 모든 영역에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정치 영역에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갈망하는 1순위 이상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다. 촘촘한 신뢰와 공유된 가치를 바탕으로 한 끈끈한 사회, 도덕을 강요하고 사회적 결속을 유도하는 직관적 질서다. 역사적으로 플라톤이나 공자가 제시했던 정치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신뢰 공동체는 소규모에서는 잘 작동하지만 확장성(scalability)이 없다. 거대한 사회를 운용하기 위해 권력을 집중시키면, 지도자가 부패하거나 악용되었을 때 치명적인 대재앙을 초래하는 '선한 왕의 문제(Good king problem)'에 직면한다.
따라서 현대 문명이 선택한 2순위 현실은 자유주의와 제한된 정부다. 국가 권력의 남용이라는 대재앙을 막기 위해 국가가 선(善)을 강제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4chan 밈, 트위터의 극단주의자, 인플루언서의 어그로, 인터넷 약물 거래 같은 반사회적이고 자해적인 행위까지 법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불쾌한 현실을 견뎌야 한다.
경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직관이 요구하는 1순위 이상은 사회주의(Socialism)와 도덕적 협동이다. 거대한 분업 체계 안에서 모두가 이기심을 버리고 공공을 위해 헌신하며 성과를 평등하게 나누는 것이 인간의 도덕적 직관에 가장 잘 부합한다. 과거 고대와 중세 경제학이 거래의 공정성을 논할 때 '정당한 가격(just price)'에 집착했던 이유다.
그러나 현대 경제가 채택한 2순위 현실은 자본주의와 시장 경쟁이다. 가격이 자율적으로 변동하게 내버려 둘 때 비로소 거대한 규모의 협동과 복잡한 분업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당사자들에게 도덕적 헌신 대신 전략적·이기적 태도를 요구한다. 그 결과 극심한 불평등, 환경 파괴, 억만장자의 출현, 청년층의 고용 불안정이라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문화비평가 앤드루 포터(Andrew Potter)가 지적했듯, 이러한 2순위 체제의 결말은 누구의 가슴도 뛰게 만들지 못한다. "인류 발전의 최종 단계이자 승인을 향한 오랜 투쟁의 결실이 고작 '권리장전(Bill of Rights)과 베스트바이(Best Buy)의 결합'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그 누구의 마음도 환희로 채워주지 못한다."
1순위의 유토피아적 이상은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지만 현실에서는 마비와 폭정을 낳고, 2순위의 현실 체제는 효율적이고 안전하지만 인간의 정서를 정서적으로 채워주지 못한다. 마요네즈 회사 직원들이 "마요네즈 판매"라는 건조한 진실 대신 "지구 구하기"라는 영감 어린 이야기를 필요로 하듯, 현대인들 역시 이 씁쓸한 2순위 현실을 견디기 위해 끊임없는 고상한 명분을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4. 문명을 안으로부터 위협하는 엘리트 내부의 세 집단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는 대중의 직관에 반하기 때문에 가만히 두면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정치학자 토머스 다이(Thomas Dye)와 하몬 지글러(Harmon Ziegler)가 '민주주의의 역설(The Irony of Democracy)'이라 불렀듯, 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대중 전체의 선천적인 자유주의 의식이 아니라, 제도의 가치를 이해하는 엘리트 계층의 동의와 지지다.
그러나 정작 이 문명을 지속적으로 재현해야 할 엘리트 내부에서 체제의 뿌리를 흔드는 세 가지 위협 집단이 등장하고 있다.
첫째, 이상주의자들(The Idealists)이다. 이들은 2순위 타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규모 공동체(시골 마을, 의용 소방대, 파머스 마켓, 캠핑 등)에서나 작동할 법한 1순위 도덕 직관을 대규모 국가와 시장 제도를 개혁하는 데 직접 적용하려는 집단이다. 이들은 좌파와 우파의 형태로 모두 나타난다. 좌파 이상주의자는 자신들의 가치가 완벽히 실현될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우파 이상주의자는 자신들의 가치가 완벽했던 과거의 신화적 공동체를 복원하려 한다. 표현 방식만 다를 뿐 둘 다 낭만적 유토피아주의라는 본질은 같다.
히스 교수는 이들이 대규모 협동 시스템의 복잡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회주의 경제학자 오스카 랑게(Oskar Lange)조차 "자본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경쟁이 사업가들로 하여금 마치 사회주의 생산 관리자처럼 행동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이라고 인정했듯이, 시장 경쟁이라는 2순위 메커니즘 없이는 대규모 경제의 복잡한 계산을 수행할 수 없다. 1순위 도덕 직관만으로는 문명의 규모를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이상주의자들은 외면하는 것이다.
둘째, 모범생/일반인들(The Normies)이다. 이들은 '권리장전과 베스트바이' 수준의 현실에 단순 만족하며, 왜 누군가가 그 이상을 꿈꾸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집단이다. 이들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차악으로서의 2순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의 최고 열망을 채워주는 1순위 이상이라고 착각한다.
겉으로는 체제의 수호자인 척하지만, 이들의 안이함은 체제의 도덕적 비참함을 노골적으로 방치함으로써 이상주의자들에게 아주 쉬운 공격거리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이상주의자들로 하여금 "체제 반대자는 상상력이 빈곤하거나 도덕적으로 부패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는다.
셋째, 역사적 신뢰를 잃은 청년 세대(The Young & Intergenerational Distrust)다. 미디어 및 정보 기술의 폭발적 발전은 세대 간 수직적 소통을 줄이고 동세대 간 수평적 소통을 압도적으로 늘려놓았다. 그 결과 1960년대의 "30대 이상은 믿지 마라"라는 구호 이래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경멸이 청년 세대에 내면화되었다. 기성세대가 스마트폰이나 PDF 파일을 제때 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역사적 경험과 지혜 전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청년층은 직관적인 1순위 이상주의에 자연스럽게 끌린다. 그러나 2순위 체제가 왜 최선인지를 이해하려면 역사적 시행착오에 대한 교육과 기성세대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다. 기성세대를 도덕적으로 무능하거나 탐욕스럽다고 비하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인류가 수많은 피를 흘리며 얻어낸 2순위 타협이 단순한 '변절'이나 '기만'으로 치부되기 쉽다.
5. "14세기 수도승들도 이미 해봤단다": 역사적 경험과 세대 간 신뢰
조셉 히스 교수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세대 간 신뢰와 역사적 경험이 왜 중요한지를 생생한 에피소드로 전달한다. 대학생 시절, 그는 혈기 왕성했던 치기 어린 유토피아주의(full of shit)에 빠져 급진적인 좌파 사상을 열정적으로 주장하곤 했다.
당시 히스 교수의 아버지는 13세기 독일 수도원의 논리학과 문법 교육을 연구했던 중세 사학자였다. 아들이 세상의 모든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며 뜨거운 열정으로 급진적인 유토피아적 구상을 늘어놓을 때, 아버지는 결코 화를 내거나 비판하지 않았다. 대신 아들 입장에서 세상에서 가장 속터지고 짜증 나는 방식으로 반응하곤 했다.
"참 흥미로운 생각이구나. 사실 14세기에 프란체스코 3회 수도승들도 정확히 그런 방식으로 시도해 본 적이 있단다."
"2세기의 엔크라티테스파(Encratites) 수도승들도 정확히 그 사상에 매료되어 있었지."
아들이 가져오는 아무리 참신하고 급진적인 유토피아 제안이라도, 아버지는 역사 속에서 이미 수백 년 전에 잊혀진 수도승이나 수녀들이 수십 년간 인생을 바쳐 직접 실행해보고 참담하게 실패했던 사례를 담담하게 끄집어냈다.
청년 시절의 히스는 아버지가 왜 그런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학자로서 성숙한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 우리가 꿈꾸는 직관적이고 완벽한 도덕적 유토피아는 이미 역사 속에서 인류가 수없이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던 길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2순위 제도는 기성세대의 도덕적 열정이 부족하거나 부패해서 만들어진 변절의 산물이 아니라, 수많은 유토피아적 실험의 참혹한 실패 끝에 가까스로 찾아낸 소중한 역사적 유산인 것이다.
6. 문명이라는 '더러운 일', 누군가는 해야 한다
현대 문명은 인간의 본능적인 정서와 도덕관에 자연스럽게 들어맞는 매끄러운 건축물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 남용과 효율성 마비라는 더 큰 대재앙을 막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기워 만든 복잡한 '제도적 편법들의 집합체'다. 그렇기에 가만히 내버려 두면 본능적인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나 반사회적 도덕관에 밀려 언제든 더 작은 규모의 직관적 사회로 분해되어 버릴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결국 문명을 지키고 다음 세대에 재현하는 일은 겉보기엔 그리 고상하지도 않고, 누구에게도 열렬한 찬사를 받지 못하는 '더러운 일(dirty job)'일지도 모른다.
마요네즈를 만들어 파는 지극히 상업적인 일에 "지구 구하기"라는 거창한 사명을 덧씌워야만 직원들에게 동기가 부여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2순위 문명을 지켜내는 일 역시 "권리장전과 베스트바이의 결합"이라는 서글픈 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이 왜 최선인지를 끊임없이 설득해야 하는 고단한 작업이다.
우리는 직관적이고 완벽해 보이는 유토피아적 유혹을 뿌리치고, 수많은 역사적 실패 끝에 얻어낸 이 유연하고 현실적인 2순위 문명을 지켜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누군가는 이 재미없고 지루하지만 위대한 '더러운 일'을 계속해서 해나가야만 한다.
Source: Joseph Heath, Reproducing civilization It’s a dirty job, but someone has to do it, In Due Course, Oct 25,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