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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악의가 없는데 왜 사회는 불의해질까? 복잡계 이론이 말하는 '구조적 불의'의 비밀

필자 Econ Blog_K의 공개 원문을 허락받아 자동 수집했습니다. 문장과 이미지 순서를 보존하고 지면 폭만 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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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두가 최선을 다해도 비극이 발생하는 이유

미국의 한 도시에 사는 싱글맘 샌디(Sandy)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샌디는 매일 직장으로 출퇴근하며 어린 자녀를 키우는 평범하고 성실한 시민입니다. 어느 날 그녀가 살던 아파트 건물이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팔리면서 샌디는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샌디는 새로운 집을 찾아 나서지만, 시내 주택 가격의 급등, 이용 가능한 임대 주택의 부족, 아이를 위한 학교 환경 등 여러 복잡한 조건이 얽히면서 결국 집을 구하지 못하고 노숙 위기에 내몰립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 누구도 샌디에게 악의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파트 소유주는 정당한 법적 권리를 행사했고, 부동산 시장의 다른 행위자들도 각자의 합리적인 목표를 추구했을 뿐입니다. 샌디를 의도적으로 괴롭히거나 차별한 악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샌디는 명백히 절박하고 불평등한 비극에 직면해 있습니다.

"구조적 불의(Structural Injustice)란 무엇인가?"

개인이나 제도가 딱히 범법 행위나 악의적인 차별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왜 사회 시스템 속에서 특정한 집단은 심각한 박탈과 취약성에 노출되는 걸까요? 정치철학자 김호찬 교수는 논문 〈생성적 혼란으로서의 구조적 불의(Structural Injustice as Emergent Disorder)〉에서 이 오래된 수수께끼를 '복잡계 관점(Complexity View)'으로 풀어나갑니다.

본 글에서는 정치철학의 난제를 가로지르는 4가지 핵심 통찰을 통해, 아무도 악의가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불의가 탄생하며, 우리는 이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찾아봅니다.

2. 개인의 의도와 대규모 결과의 단절 (복잡계와 '생성적 질서/혼란')

<선의로 가득 찬 이웃들이 만들어낸 완전한 격리>

우리는 흔히 "사회적 불의가 존재한다면 어디엔가 나쁜 의도를 가진 악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복잡계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개인의 미시적 의도와 사회적 대규모 결과 사이에 거대한 단절이 발생합니다.

근대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A. Hayek)는 개별 행위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국가의 중앙 계획 없이도 이로운 사회적 합리성을 만들어낸다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시장이 누구의 의도도 없이 효율성을 창출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김호찬 교수는 이 메커니즘을 뒤집어, 복잡계 속 상호작용이 이로운 질서뿐만 아니라 의도치 않은 해악과 불평등을 낳는 '생성적 혼란(Emergent Disorder)'을 도출해 냅니다.

토마스 셰링(Thomas Schelling)의 유명한 '거주지 분리 모델'은 이 단절을 명쾌하게 보여줍니다. 주택 시장에서 거주자 개개인이 단지 "내 이웃의 최소 3분의 1 정도는 나와 같은 인종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하고 온건한 선호를 가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들은 인종적으로 소수가 되는 것(2 대 1 비율)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포용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개별 행위자들이 복잡한 시장 시스템 안에서 상호작용을 시작하면, 놀랍게도 결과는 '완전한 인종 격리 공간'으로 귀결됩니다. 누구도 인종 격리를 의도하지 않았고, 누구도 인종적 적의를 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전체 차원에서 '격리'라는 거대한 거시적 결과가 출현하는 것입니다.

복잡계 이론에서는 이를 '인식적 생성성(Epistemic Emergence)'이라고 부릅니다. 마크 비도(Mark Bedau)가 지적하듯, 인식적 생성성을 지닌 시스템에서는 거시적 결과를 선험적인 선형 논리로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오직 "시스템을 직접 시뮬레이션하고 실행해 보아야만(Set up the system, let it roll, and see what happens)" 어떠한 거시적 결과가 출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회철학자 샐리 해슬랭어(Sally Haslanger)는 사회 시스템이 갖는 이러한 자율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사회는 그 누구에 의해 계획되거나 실행되지 않는다. 사회는 자율적으로 조직되는 시스템이다. 입법자, 경제학자, 기획 위원회, 정책 입안자들이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개입하려고 노력하고 그들의 행위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시스템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말하자면 '스스로의 삶'을 가지고 있으며, 발생하는 일의 대부분은 그 누구에 의해 디자인되거나 의도된 것이 아니다." — 샐리 해슬랭어 (Sally Haslanger, 2023)

존 롤스(John Rawls) 역시 '배경적 정의(Background Justice)'를 논하며 이 점을 인정했습니다. 개개인이 기존의 공정한 규칙 내에서 아무런 불공정 행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수많은 개인적 거래와 선택이 복잡하게 누적되면 사회 전체의 배경적 정의는 스스로 침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회적 불의는 특정 음모나 악인의 존재 없이도, 개별 행위의 단순 합으로 환원되지 않는 시스템의 '복잡성(Complexity)' 그 자체 때문에 발생합니다.

3. 기존 이론의 딜레마 — "국가 탓인가, 자연재해인가?"

허리케인은 비극이지만, 주거 난은 왜 불의인가?

그렇다면 가해자가 없는 비극을 과연 '불의(Injustice)'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기존 학계는 이 질문 앞에서 두 가지 상충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규범적 도전 (Normative Challenge): 데이비드 에스틀런드(David Estlund) 같은 철학자들은 누군가의 그릇된 행위(wrongdoing)가 없다면 그것은 불의가 아니라 단순한 '비극'이나 '불운'에 불과하다고 지적합니다. 허리케인이 마을을 덮쳐 집을 잃은 사람의 상황은 가슴 아픈 비극이지만, 누구의 의무 위반도 아니기에 사회적 '불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샌디의 상황에 가해자가 없다면, 허리케인 피해와 도덕적으로 무엇이 다르냐는 강력한 비판입니다.

중복성 도전 (Redundancy Challenge): 반대로 메이브 맥키온(Maeve McKeown) 등 최근의 제도주의 학자들은 샌디의 노숙 위기가 사실 국가나 강력한 제도의 책임이라고 주장합니다. 정치가 공공주택을 늘리고 임대료를 규제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제도적 잘못(Institutional Wrongdoing)'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국가와 제도의 잘못으로 돌린다면, 굳이 '구조적 불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 필요 없이 기존의 '제도 정의론'으로 충분하므로 개념 자체가 중복되고 무용해집니다.

"우리를 예견할 수 없이 해치는 허리케인과 같은 자연재해는 비극이지 불의가 아니다... 불의가 단순한 비극과 구별되는 핵심은 행위자의 그릇된 행위(wrongdoing)에 뿌리를 두고 있느냐이다." — 데이비드 에스틀런드 (David Estlund, 2024)

김호찬 교수의 '복잡계 관점(Complexity View)'은 이 딜레마를 해소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사회 구조는 단순히 국가가 제정한 공식적 법률이나 제도로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문화, 관습, 일상적 개인들의 개별적 선택이 얽혀 예견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구조적 불의는 국가의 단순한 정책 실패로 전부 환원되지 않으므로 '중복성 도전'을 피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의 행위가 상호작용하여 출현한 결과라는 점에서 허리케인과 같은 단순 자연재해와는 명확히 구분되어 '규범적 도전' 또한 극복해 냅니다.

4. 가해자가 없어도 '불의'라고 부를 수 있는 두 가지 도덕적 이유

<가해자가 없어도 이것이 '비극'이 아닌 '불의'인 이유>

의도적인 가해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복잡계가 만든 이 결과가 왜 단순한 '비극'이 아닌 '도덕적 불의'가 되는 걸까요? 논문은 두 가지 강력한 도덕적 논거를 제시합니다.

1) 기여에 의한 잘못 (Argument from Contribution)

초기에는 복잡계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행위자의 무지(ignorance)가 용서 사유(excuse)가 될 수 있습니다. 즉, 나의 행위가 어떤 거시적 해악을 낳을지 모를 때의 기여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의 상호작용 결과가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순간부터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해악이 밝혀졌음에도 그 구조적 실천에 계속 기여하는 것은 더 이상 무지가 아니라 '의무 위반(wrongdoing)'이 됩니다.

"내가 보탠 작은 선택 하나는 영향력이 미미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명이 호수에 독성 폐기물을 버려 7명만으로도 호수가 오염된 상황을 떠올려 봅시다. 자신의 기여가 단독으로 결정적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 누구도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집단적 해악을 일으키는 구조적 실천에 계속 힘을 보태는 행위는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2) 소극적 불의 (Argument from Passive Injustice)

정치철학자 유디스 슈클라(Judith Shklar)는 행위자가 적극적으로 해를 끼치는 '적극적 불의' 외에도 '소극적 불의'가 존재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떤 고통이나 빈곤이 과거에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였을지라도, 사회적 기술과 제도가 발전하여 이를 예방하거나 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면, 이를 인지하고도 방치하는 것은 더 이상 자연적 비극이 아니라 정당한 분노의 대상이 되는 정치적·도덕적 '불의'입니다.

"과거의 일부 불행들은 이제 불의가 되었다. 영아 사망률이나 기근 같은 것들이 그 예다." — 유디스 슈클라 (Judith Shklar, 1990)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소비하고, 주거지를 선택하며, 성별·인종적 관습을 재생산하는 행위들은 누군가를 해치려는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적 성찰을 통해 이러한 실천들이 누군가에게 구조적 박탈을 안겨준다는 점을 깨달았음에도 "시스템이 원래 그렇다"며 방관한다면, 우리는 '소극적 불의'의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5. 완벽한 정책은 없다 — '실험주의'로 풀어가는 사회 개혁

<청사진식 개혁을 넘어: 위험 관리로서의 사회적 실험주의>

사회 시스템이 복잡계라는 사실은 사회 개혁에 서늘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사전에 모든 부작용을 완벽하게 예측하고 통제하는 거대한 청사진식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선한 의도로 도입된 정책이 복잡계 안에서 역효과를 낸 대표적인 사례가 '임대료 규제(Rent Control)'입니다. 세입자를 보호하고 주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된 임대료 상한선 제도는, 장기적으로 집주인들의 임대 주택 공급 유인을 감소시켜 도시 전체의 임대 주택 부족을 가중시키고 주거 난을 오히려 악화시키는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시스템의 복잡성 앞에 무기력하게 개혁을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이콥 바렛(Jacob Barrett)과 앨런 부캐넌(Allen Buchanan) 등의 프래그머티즘 및 실용주의적 접근법(Pragmatist/Experimentalist Approach)은 전혀 다른 대안을 제시합니다.

사회 개혁을 완벽한 사전 예측에 의존하는 거대한 입법이 아니라, 위험 관리 전략으로서의 '소규모 사회적 실험'으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사전 예측(Ex-ante Prediction)의 한계 인정: 복잡계에서는 설계 단계에서 부작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합니다.

사후 평가(Ex-post Evaluation)와 성찰성(Reflexivity): 수정과 철회가 가능한 형태의 소규모 정책 실험들을 시도하고, 현장에서 피해를 입는 당사자들의 경험과 사후 결과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제도를 수정해 나가는 성찰적 학습 과정을 거칩니다.

위험 관리로서의 개혁: 실험주의는 단순한 시행착오가 아니라, 실패했을 때 파국적 피해를 막고 철회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개혁의 위험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방법입니다.

복잡성은 개혁을 포기하기 위한 핑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보다 겸손한 자세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성찰적 사회 실험에 지속적으로 나서야 하는 도덕적 당위가 됩니다.

6.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질문

구조적 불의는 특정 개인의 악의나 국가 기관의 단일한 잘못으로 환원되지 않는,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낳은 '생성적 혼란'입니다. 복잡계 속에서 우리 개인이 가진 예측 능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도덕적 책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상적 행위가 누군가의 구조적 해악에 기여할 수 있음을 성찰해야 하며, 사회적으로 예방 가능한 고통을 방치하는 소극적 불의에 맞서 지속적인 실험과 개혁을 요구해야 합니다.

복잡성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불의입니다. 글을 맺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어쩔 수 없다'나 '시스템 탓이다'라는 핑계 뒤에 숨어, 예방할 수 있는 얼마나 많은 소극적 불의를 방치하고 있습니까?"

Source: Ho Chan Kim, Structural Injustice as Emergent Disorder, APSR on line, Sep 25,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