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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하나에 목숨 건 지식인: 100년 전 양치아오는 왜 '경제(經濟)'라는 단어를 거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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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서구 근대 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언어적 격변을 겪었습니다. 서양의 낯선 학술 개념을 한자(漢字)라는 기존 어휘 체계에 이식하는 작업은 단순한 번역을 넘어, 문명의 패러다임을 재구성하고 사상적 정체성을 바로 세우려는 치열한 지적 투쟁이었습니다.

1898년 무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중국의 대지식인 양치아오(梁啓超) 역시 이러한 번역의 최전선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쏟아지던 서구 근대 학술 서적을 정열적으로 포식하며, 대중에게 새로운 지식을 신속하고 명쾌하게 전파하기 위한 대중적 글쓰기 양식인 '신문체(新文體)'를 창안했습니다.

그는 '진화(進化)', '철학(哲學)', '논리학(論理學)', '물리학(物理學)'과 같은 일본식 한자 번역어를 망설임 없이 전격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단어 앞에서만큼은 평생에 걸쳐 타협을 거부하며 집요하게 고민하고 저항했습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사용하는 학문 명칭, 'Political Economy / Economics', 즉 '경제(經濟)'였습니다. 양치아오는 왜 이 단어를 그토록 한사코 거부했던 것일까요?

1. "경제(經濟)는 틀렸다": 양치아오의 번역 잔혹사와 '생계학(生計學)'의 탄생

양치아오가 일본식 번역어인 '경제학'을 배척한 근본적인 이유는 전통 한문 맥락에서 형성된 원의(原義)와의 충돌 때문이었습니다. 중국 고전에서 '경제'는 '경국제세(經國濟世: 나라를 가꾸고 백성을 구제함)'의 줄임말로, 국가 통치 행위와 사회 구제 전반을 통합적으로 이르는 원대한 개념이었습니다. 이를 서구의 특수한 물질적·재율적 학문인 'Economics'의 번역어로 한정해 쓸 경우, 자칫 학문의 범주를 왜곡하고 고전 어휘의 본래 뜻에 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컸습니다.

그렇다고 당대 최고 수준의 한학 소양을 갖춘 대번역가 엄복(嚴復)이 제안한 '계학(計學)'을 따를 수도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지식인 사이의 선명한 번역관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엄복은 선진(先秦) 시대의 은근하고 문아한 문체를 고수하는 엘리트주의적 번역을 지향한 반면, 양치아오는 대중 계몽을 위해 쉽고 명쾌한 '신문체(新文體)'를 지향했습니다. '계학'은 의미가 지나치게 추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혁명'처럼 현대적 조어력을 발휘해야 할 때 '계혁명(計革命)'이라는 극도로 어색한 합성어를 만들 수밖에 없는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양치아오는 동서양 사상을 모두 어우르는 최선의 번역어를 찾아 중국 고대 문헌을 뒤지며 잔혹할 정도의 어휘 모색을 거쳤습니다.

정술리재학(政術理財學): 원어인 'Political Economy'의 의미를 충실히 반영해 초기 연설과 글에서 직역에 가깝게 사용했으나, 4글자 명칭은 너무 길고 복잡하다는 대중적 비판에 직면하여 즉각 철회했습니다.

식화(食貨) / 심중(審重) / 화식(貨殖): 각각 《한서(漢書)》, 《관자(管子)》, 《사기(史記)》 등 고전에서 추출했으나, 객관적 재화에만 치중하거나(식화), 당대 언어 생활에서 완전히 잊혔거나(심중), 개인의 사적 치부에 편중되어 공공 정책의 의미를 담지 못한다는(화식) 이유로 포기했습니다.

평준학(平準學): 《사기》의 '평준서(平準書)'에 착안해 1902년 초 《신민총보(新民叢報)》 논설에 '균리이민(均利宜民)'의 뜻을 담아 임시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학문의 본질을 완벽히 포섭하지 못한다는 스스로의 판단하에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철회했습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양치아오는 1902년 5월, 《신민총보》 제7호에 게재한 〈생계학 학설 연혁 소사(生計學學説沿革小史)〉를 통해 마침내 '생계학(生計學)'이라는 독자적인 대안 어휘를 선언했습니다.

"일본어에서 번역된 여러 학문 명칭은 대부분 그대로 차용해도 무방하지만, 오직 '경제학'과 '사회학' 두 가지만큼은 내 개인적 식견으로 반드시 새로운 명칭을 찾아 바로잡아야만 한다."

양치아오는 개인의 삶과 국가의 자원 운용을 동시에 아우르는 '생계(生計)'야말로 서구의 'Economics'를 대체할 가장 정교한 번역어라 확신하고, 이를 사상적 대안으로 대대적으로 채택했습니다.

[참고] 양치아오의 20년에 걸친 'Economics' 번역어 6단계 변천사

근대 지성사학자 모리 토키히코(森 時彦)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양치아오의 번역어 투쟁은 그의 서구 학문 수용 깊이와 정치적 환경에 따라 선명한 6단계 로드맵을 그려냅니다.

모색기 (~1902년 5월): '부국학', '리재학', '안생학', '평준학' 등 다양한 고전 및 신조어를 시험하던 탐색 과정.

'생계'기 (1902년 5월 ~ 1906년 3월): '생계학'을 공식 번역어로 확립하고 《신민총보》를 중심으로 집중 전파하던 소신 고수기.

'경제'기 (1906년 3월 ~ 1910년 2월): 혁명파 및 일본 유학생들과의 격렬한 대논쟁 속에서 대중적 설득을 위해 전략적으로 '경제'를 타협 수용한 시기.

'생계' 회귀기 (1910년 2월 ~ 1912년 10월): 청말 입헌 운동의 전면화에 따라 독자층이 국내 한학 지식인으로 바뀌며 다시 '생계'로 복귀한 시기.

병용기 (1912년 10월 ~ 1920년 10월): 귀국 후 수사적 미디어 전략에 따라 구어(연설)는 '경제', 문어(학술 글쓰기)는 '생계'로 철저히 이원화한 시기.

초극기 (1920년 10월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근대성을 재검토하며 '생계학'을 유가적 '분배 우선주의' 사상으로 승화시킨 완숙기.

2. 정치적 대논쟁과 젊은 세대의 압박: 어쩔 수 없었던 '경제'로의 일시적 항복

'생계학'을 고수하려던 양치아오의 학술적 신념은 1906년 무렵 커다란 정치적 시련을 맞이합니다. 정치적 숙적이었던 쑨원(孫文) 중심의 혁명파 잡지 《민보(民報)》 및 일본에 체류 중이던 청년 유학생들과 토지국유화 문제를 둘러싸고 역사적인 사상 대논쟁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독일 후기 역사학파 경제학 이론과 사회주의 사상이 교차하던 이 격렬한 수사학의 전쟁터에서, 양치아오는 언어적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논쟁 상대이자 주 청중이었던 청년 유학생들은 전통 한문 소양이 부족했던 반면, 일본 현지 학술계에서 통용되던 '경제(經濟)'라는 단어에 완벽히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양치아오가 아끼던 '생계(生計)'라는 번역어는 한가하고 예스러운 표현으로 비쳤습니다.

[양치아오의 전략적 결단] 청년 유학생과 혁명파의 언어 습관: '경제(經濟)' 전면 사용 ↕ 언어적 불일치로 인한 사상 전파 실패의 위기 양치아오의 학술적 소신: '생계(生計)'가 정당한 본래 의미 ⇒ 최종 선택: 대중 설득과 논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신의 언어적 고집을 잠시 유예하고 '경제'를 전략적으로 수용 ('경제기' 진입)

상대와 공통의 언어 판을 짜지 않으면 메시지 자체가 전달되지 않는 현실적 압박 속에서, 양치아오는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자신의 논설에 '경제'라는 표현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타협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이 항복은 일시적이었습니다. 1910년 청나라 조정이 의회 개설을 약속하면서 담론의 중심이 중국 국내의 입헌파 한학 지식인으로 이동하자, 양치아오는 《국풍보(國風報)》를 통해 즉시 '생계'라는 단어로 되돌아가는 **'생계 회귀기'**를 열었습니다.

3. 말할 때는 '경제', 쓸 때는 '생계'? — 양치아오의 입체적 미디어 전략

1912년 신해혁명 성공 후 귀국한 양치아오는 매체의 성격과 수용자의 특성에 따라 번역어를 철저히 분리하는 고도의 입체적 미디어 전략(병용기)을 전개했습니다.

1) 구어(연설): 소통의 효율을 위한 '경제(Jingji)'의 채택

귀국 후 정치인이자 대중적 지식인으로서 연단에 설 일이 많아진 양치아오는 연설 원고에 '경제'를 주저 없이 사용했습니다. 중국어 음운 구조상 구어 발음 'Shengji(생계)'는 청중이 청각적으로 즉각 파악하기에 모호했던 반면, 이미 대중적 인구에 두루 회두되던 'Jingji(경제)'는 명확한 전달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불특정 다수와 대면하는 말하기 공간에서는 소통의 실용성이 우선이었습니다.

입체적 예외의 순간: 예외도 존재했습니다. 1912년 10월 30일, 청나라 황족·만주족으로 구성된 '팔기생계회' 청중 앞에서의 연설(〈북경공민회 팔기생계회 연합환영회 연설석〉)에서 양치아오는 연설문임에도 불구하고 '경제' 대신 '생계'라는 표현을 고수했습니다. 청중 집단의 명칭과 그들이 처한 자립 문제를 고려한 철저히 맞춤형 언어 구사였습니다.

2) 문어(학술 글쓰기):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한 '생계(生計)'의 고집

반면 《용언(庸言)》, 《대중화(大中華)》 같은 고품격 교양 잡지나 그의 저작인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등 문어체 학술 논문에서는 고집스럽게 '생계'라는 단어를 되살려 썼습니다. 글쓰기를 통해서만은 문명의 정체성과 개념의 정확성을 타협하지 않겠다는 지적 자존심이었습니다.

어휘 차용의 구체적 고백: 물론 언어의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했습니다. 양치아오는 1914년 《용언》 제2권 제12호에 게재한 〈일석귀국후칠년말소감(逸席歸國後七年末所感)〉에서 자원과 시간의 비효율적 배치를 뜻하는 서구어 'uneconomical'을 고심 끝에 다루며, "이 개념만큼은 '불생계(不生計)'로 대처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일본어 '불경제(不經濟)'를 차용한다"고 직접 자신의 번역상 한계를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4. 단순한 번역을 넘어 사상의 승화로: '생계학'의 최종 진화

1920년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유럽을 직접 참관하고 돌아온 양치아오는 서구의 근대 국가주의와 자본주의 문명에 깊은 회의를 품게 됩니다. 이 시기 그의 사상은 마침내 완숙한 '초극기(超克期)'에 도달합니다.

그는 대표작 《청대학술개론(清代學術概論)》을 통해, 자신이 창안한 '생계'라는 어휘를 서구 'Political Economy'의 단순한 대체 번역어 수준에서 완전히 탈피시켰습니다. 양치아오는 '생계'를 중국 전통의 '국계민생(圖計民生)' 사상, 유가(儒家)의 공평무사한 경세제민(經世濟民) 정신, 그리고 서구의 현대 경제학을 통섭·지양(止揚)하는 고차원적 신학문 체계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양치아오가 도달한 '생계학'은 서구의 'Political Economy'와 비교할 때 어떤 사상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양치아오는 그 핵심을 "분배론(分配論) 대 생산론(生産論)"의 대립 구도로 선명히 정립했습니다.

"문화의 진전이 깊은 국가의 정치 문제는 반드시 국민의 생계(生計)를 중심에 두게 마련이다. 우리 중국 생계학설의 가장 뛰어난 특색은, 서구 경제학이 '생산론'을 첫머리에 두는 것과 달리 언제나 '분배론'을 으뜸(首位)에 두고 생산론을 그 다음(次位)에 두었다는 점에 있다." — 양치아오,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중

양치아오가 깨달은 서구 근대 경제학의 비극은 부의 증대만을 목표로 하는 '생산 최우선주의'에 있었습니다. 반면, 공자·맹자에서 관자로 이어지는 중국 고유의 '생계학'은 부의 균등한 나눔과 공동체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분배 중심의 평등주의적 이상'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의 '생계학'이 서구 개념을 번역하기 위한 어휘 모색에서 출발했다면, 말년의 '생계학'은 서구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동서양의 사상을 통합하여 동아시아 고유의 유가적 사회주의 이상을 구현해 낸 독자적 사상 체계로 최종 진화한 것입니다.

결론: 단어 하나에 담긴 100년 전 근대 지식인의 자존심과 유산

양치아오가 20년에 걸친 세월 동안 '경제'라는 단어의 거대한 흐름에 저항하며 '생계학'이라는 외로운 깃발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한 한학자의 케케묵은 고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서구의 근대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추종·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역사적 정체성인 유가적 경세사상과 주체적으로 결합해 서구 문명을 넘어서고자 했던 동아시아 지식인의 치열한 자주적 노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구에서 유입된 수많은 개념과 번역어들을 아무런 의구심이나 사유 없이 무비판적으로 소비하곤 합니다. 100년 전, 단어 하나를 조어하는 데에도 문명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지적 목숨을 걸었던 양치아오의 번역 잔혹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언어 속에 과연 어떤 주체성과 가치가 담겨 있는지 나지막하지만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Source: 森, 時彦, 生計學と經濟學の閒, 東方學報 (2000), 72: 503-523, Kyoto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