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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재의 역설: 글로벌 금융 '배관'이 중국 위안화로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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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벨라루스 비료 회사의 대금이 사라진 이유

벨라루스의 한 비료 회사가 아제르바이잔의 구매자에게 물건을 팔고 대금을 달러로 받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흔히 이 과정을 단순히 '돈을 보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현찰이 든 봉투가 국경을 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전 세계 은행들이 서로의 장부 가치를 조정하며 다음 은행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복잡한 과정이 이어집니다.

이는 어린 시절 즐기던 '전화놀이(Game of Telephone)'와 매우 흡사합니다. 첫 번째 사람이 속삭인 단어가 여러 명을 거쳐 마지막 사람에게 전달되듯, 결제 정보도 여러 은행을 거쳐 최종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이 이 연결 고리 중 하나를 끊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벨라루스의 비료 대금은 길을 잃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글로벌 금융의 '배관 시스템'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2. 금융의 '전화놀이', 코레스 뱅킹(Correspondent Banking)의 위험성

국가 간 결제가 이루어지는 하부 구조를 '코레스 뱅킹(환거래 뱅킹)'이라고 합니다. 자국 통화가 아닌 달러 같은 외화로 결제할 때, 은행들은 해당 통화를 직접 취급할 수 있는 '중개 은행'에 계좌를 두고 거래를 연결합니다. 이때 거치는 각 단계를 '홉(Hop)'이라고 부릅니다.

효율적인 결제를 위해서는 JP모건(JP Morgan)이나 씨티그룹(Citigroup)과 같은 거대 '중앙 허브'를 거치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과거에는 은행들이 '뱅커스 알마낙(Banker’s Almanac)'이라 불리는 거대한 전화번호부 같은 책을 보며 누구를 통해 돈을 보낼지 찾았지만, 오늘날 이는 고도의 유료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로 대체되었습니다.

시카고 대학교 브렌트 나이먼(Brent Nyman) 교수는 이 '홉'이 늘어날 때의 리스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각 단계(Hop)마다 리스크가 따릅니다. 새로운 중개 기관이 추가될 때마다 비용이 발생하고, 시간이 지연되며, 상대방이 파산할 위험(Counterparty Risk)도 커지죠. 결국 원래 단어가 너무 멀어져 우스꽝스럽게 변하는 전화놀이처럼 말입니다."

은행 간의 '홉'이 늘어날수록 발생하는 리스크는 명확합니다.

비용 증가: 각 은행은 자금 세탁 방지(AML)와 준법 감시(Compliance)를 위해 인력을 투입해야 하며, 이는 수수료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시간 지연: 서로 다른 시차와 영업시간을 가진 여러 은행을 거치다 보면, 순식간에 끝날 거래가 며칠씩 걸리기도 합니다.

거래 상대방 위험: 대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중개 은행이 파산하거나 자금이 묶일 위험이 존재합니다.

3. 달러가 금융계의 '영어'인 진짜 이유: 네트워크 효과와 표준화

왜 벨라루스와 아제르바이잔은 자국 통화가 아닌 달러로 거래할까요? 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이를 '언어'에 비유했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영어가 통용되듯, 금융 세계에서는 달러가 '표준어'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경제학의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s)와 표준화 원리로 설명됩니다. 모두가 영어를 배우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는 것이 가장 유리한 것처럼, 모든 은행이 달러 계좌를 가지고 있기에 달러를 쓰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2021년의 압도적 위상: 2021년 기준, 벨라루스 은행들이 전 세계 신흥 시장과 연결될 때 달러나 유로를 사용하면 약 80%의 경우에서 '최단 경로(최소 홉)'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위안화의 미미한 존재감: 반면, 당시 중국의 위안화(Renminbi)가 최단 경로를 제공하는 비율은 1% 미만에 불과했습니다.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달러는 대체 불가능한 선택지였습니다.

4. '디리스킹(De-risking)'의 함정: 죄 없는 은행도 퇴출당한다?

미국의 제재는 단순히 특정 악덕 기업을 겨냥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최근 벨라루스, 러시아, 키르기스스탄, 미얀마와 같이 강력한 제재를 받는 경제권에서는 '디리스킹(De-risking)'이라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방의 대형 은행들 입장에서 제재 대상 국가의 은행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수익보다 리스크가 훨씬 큽니다. 제재를 위반했을 때 물어야 할 막대한 벌금과 평판 하락을 고려하면, 차라리 거래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무고한 구경꾼'처럼 보이는 기업들이 실제로는 제재의 직접적인 타깃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로 유입되는 군사 목적의 '이중 용도 물품(Dual-use goods)' 결제를 막기 위해 미국은 해당 거래를 돕는 은행을 직접 제재하겠다고 경고합니다. 이 경우, 금융망 차단은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실제 경제 활동을 멈추게 하려는 의도된 전략이 됩니다.

5. 제재가 낳은 뜻밖의 결과, 위안화의 급부상

강력한 제재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금융 배관을 만들어냈습니다. 나이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제재를 받은 은행뿐만 아니라 제재를 받지 않은 은행들까지도 서방 은행들의 '디리스킹'을 피해 위안화 결제 시스템으로 대거 이동하고 있습니다.

달러/유로의 몰락: 벨라루스의 사례에서 2021년 80%에 달했던 달러/유로의 최단 경로 제공 비율은 2025년 전망치 기준 50% 미만으로 급락할 것으로 보입니다.

위안화의 역습: 반면, 이제 위안화는 벨라루스 관련 거래에서 달러보다 더 적은 '홉'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더 효율적인 결제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직 전 세계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신흥 시장에서는 여전히 달러가 압도적입니다. 하지만 '심하게 두들겨 맞은' 경제권에서는 이미 달러 패권의 배관이 위안화로 교체되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6. 미국의 딜레마: '달러'라는 무기의 유효기간

미국의 가장 강력한 권력은 미사일이 아니라 '애국법(Patriot Act)'에서 나옵니다. 이 법에 따르면, 외국 은행이 미국의 소환장에 응하지 않을 경우 미국 은행과의 환거래 관계를 강제로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나이먼 교수는 이를 두고 "미국이 사실상 외국 은행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셈"이라는 비유가 성립한다고 설명합니다(비록 그는 이 과격한 비유를 직접 쓰길 주저했지만 말입니다).

이 '소환권(Subpoena power)'이야말로 미국이 전 세계 금융 배관을 통제하는 진짜 '이빨(Teeth)'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트레이드오프(Trade-off)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도구를 자주 휘두를수록, 전 세계는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 할 것입니다. 달러 계좌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순간, 미국이 쥐고 있는 그 강력한 '소환권'이라는 갈고리도 힘을 잃게 됩니다."

7. 디지털 자산과 핀테크가 바꿀 새로운 배관 시스템

미래의 금융 배관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스테이블 코인(Stablecoin)에 대한 법적 틀을 마련하는 Genius Act나, 디지털 자산 전반을 다루는 Clarity Act와 같은 법안들이 논의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기존의 복잡한 코레스 뱅킹 시스템을 우회할 수 있는 핀테크와 디지털 자산이 달러의 지배력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금융의 배관이 위안화나 암호화폐로 완전히 옮겨간다면, 미국은 더 이상 '장부'를 들여다볼 수도, 잘못된 거래를 멈출 수도 없게 됩니다.

미국이 달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제재라는 칼날을 얼마나 더 정교하게 다루어야 할까요? 우리가 알던 달러의 시대는 지금 대대적인 '배관 공사' 중인지도 모릅니다.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흐름이 바뀌는 지금, 우리는 그 이면의 거대한 전략적 변화를 주시해야 합니다.

Source: Tess Vigeland and Brent Neiman, Cut Off: How US Sanctions are Reshaping the Global Payment System, Becker Friedman Institute, Podcasts episode, Sep 1,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