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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은 사라졌지만, '우리 동네'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이유: 경제 지리학이 바꾸는 정치의 판도
필자 Econ Blog_K의 공개 원문을 허락받아 자동 수집했습니다. 문장과 이미지 순서를 보존하고 지면 폭만 조정했습니다.
이야기하는 사람노해인 · 진행 / 차우진 · 분석

1. '거리의 소멸'이라는 거대한 착각
1990년대 말, 프랜시스 케언크로스(Cairncross 1997)를 비롯한 많은 관찰자는 통신 기술의 비약적 발달로 인해 국가 간의 거리가 무의미해지는 ‘거리의 소멸(The Death of Distance)’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국가 간의 장벽을 낮추었을지는 모르나, 국가 ‘내부’에서는 지리적 요인이 그 어느 때보다 결정적인 변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경제 활동은 지리학적으로 매우 '덩어리진(Lumpy)' 형태로 나타납니다. 즉, 생산과 고용이 특정 지역에 극도로 편중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미국의 사례를 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인구 100만 명 이상의 대도시 지역은 전체 인구의 56%를 차지할 뿐이지만, 2008년 이후 전체 고용 성장률의 72%를, 2015년 이후에는 무려 75%를 독점했습니다. 이처럼 성장의 혜택이 특정 장소에 집중되면서 발생한 지역 간 불평등은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현대 정치의 갈등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프레임인 ‘경제 지리학’의 부상을 불러왔습니다.
2. 당신이 몰랐던 사실: '특수 이익'과 '집중된 이익'은 다르다
우리는 흔히 정치인들이 소수의 ‘특수 이익 집단’에 휘둘린다고 비판합니다. 이때 대중은 이러한 집단이 당연히 특정 지역에 밀집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곤 하지만, 이는 경제 지리학적으로 중대한 오해입니다. '특수 이익'과 '지리학적 집중도'는 엄연히 별개의 개념입니다.
"특수 이익 집단이 반드시 지리적으로 집중될 필요는 없다(Special interests need not be geographically concentrated)."
지리적으로 집중된 특수 이익 (예: 미국 철강 산업): 미국 전체 인구의 0.3%만을 고용하고 있지만, 종사자 대부분이 50개 주 중 단 3개 주에 모여 있습니다. 이들은 좁은 지역에 밀집된 표심을 바탕으로 관세와 같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는 데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지리적으로 분산된 특수 이익 (예: 미국 레디믹스 콘크리트 산업 / 독일 임업): 미국의 레디믹스 콘크리트 산업이나 독일의 임업 종사자들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전국 모든 지역에 고르게 퍼져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분포의 차이는 해당 산업이 정치권으로부터 어떤 형태의 '보상'을 받게 될지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됩니다.
3. 선거 제도가 누구의 주머니를 채울지 결정한다
왜 어떤 국가의 정치인은 특정 지역 공장에 보조금을 쏟아붓고, 어떤 국가의 정치인은 전국적인 복지 혜택에 집중할까요? 그 비밀은 ‘선거 제도’와 ‘경제 지리학’의 상호작용에 있습니다.
정치적 메커니즘을 결정짓는 핵심은 ‘시트-득표 탄력성(Seat-vote elasticity)’에 있습니다. 로고스키와 케이저(Rogowski & Kayser 2002)의 연구에 따르면, 다수제(Plurality) 국가는 탄력성이 높습니다. 즉, 아주 적은 표만 잃어도 의석을 대거 상실할 수 있기에 정치인들은 중위 투표자의 눈치를 보며 특정 지역에 집중된 집단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반면, 비례대표제(PR) 국가에서는 약간의 득표율 하락이 치명적인 의석 손실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전국적으로 분산된 특수 이익 집단에게 '정치적 뇌물'을 제공하는 데 훨씬 과감해집니다.
실제 사례로 오스트리아의 와인 산업을 들 수 있습니다. 비례대표제를 시행하는 오스트리아 정부는 전국에 넓게 퍼져 있는 와인 생산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품 가격의 7.58%에 달하는 ‘불법 보조금’을 지급했습니다. 비록 이 보조금이 EU 규정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례대표제하의 정치인들에게는 전국적인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분산된 유권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훨씬 '정치적으로 수지맞는'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4. 미국은 구제금융을 했고, 스웨덴은 거부한 결정적 이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과 스웨덴은 자동차 산업의 위기라는 동일한 충격을 받았지만 대응은 판이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디트로이트에 집중된 GM과 크라이슬러를 위해 8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단행했습니다. 반면, 스웨덴 정부는 자국 자동차 기업인 사브(Saab)에 대한 지원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당시 사브의 고용 인원 90%가 트롤헤탄(Trollhättan)이라는 특정 지역에 몰려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스웨덴 리더들의 이러한 선택은 결코 우연이 아닌, 선거 제도가 설계한 ‘냉혹한 정치 논리’의 산물입니다.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스웨덴에서는 특정 지역의 공장을 살리는 것보다 전국에 흩어진 유권자들에게 보편적인 혜택을 주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선거 전략입니다.
"유권자들이 나를 뽑아준 이유는 탁아소와 경찰, 간호사를 원했기 때문이지, 적자투성이 자동차 공장을 사들이라고 뽑아준 것이 아니다(Voters picked me because they wanted nursery schools, police and nurses, and not to buy loss-making car factories)."
당시 스웨덴 장관들의 이 발언은 비례대표제하의 정치인이 전국적으로 분산된 유권자 층을 어떻게 의식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들에게는 트롤헤탄 한 곳의 표심보다 전국적인 교육·복지 인프라가 더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었던 것입니다.
5. '소외된 장소'가 만드는 분노의 정치학
세계화의 혜택이 지식 기반 산업이 몰린 대도시로 집중되는 동안, 제조업 중심의 지역들은 '소외된 장소(Left-behind places)'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지형 변화는 곧바로 포퓰리즘의 확산이라는 정치적 반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영국의 브렉시트: 금융 허브인 런던의 부가 급증하는 동안, 북부 제조업 쇠퇴 지역인 보스턴 시(Boston) 유권자 75%는 EU 탈퇴에 투표하며 소외감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프랑스의 노란 조끼(Gilets Jaunes) 운동: 파리가 프랑스 다른 지역보다 1.8배 높은 1인당 GDP를 기록하며 부를 독점하자,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외곽 지역 주민들이 연료세 인상에 반발하며 일어났습니다. 특히 이 운동은 프랑스의 동북부와 서남부 지역에서 가장 강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미국의 '차이나 쇼크': 중국산 수입품 급증으로 타격을 입은 제조업 밀집 지역의 유권자들은 기존의 온건한 정치인들을 심판하고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동북부와 서남부의 소외된 유권자들은 마린 르펜(극우)이나 장 뤽 멜랑숑(극좌) 같은 극단적 후보에게 지지를 보냈습니다. 제조업이라는 특정 산업이 지리적으로 집중되어 있었기에, 산업의 붕괴가 곧 지역 공동체의 붕괴와 정치적 분노로 직결된 것입니다.
6. 보이지 않는 경제 지도를 그리는 법: 위성 데이터의 활약
경제 지리학 연구의 가장 큰 난관은 데이터 부족입니다. 특히 개발도상국은 특정 지역의 고용 현황에 대한 통계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계에서는 위성 데이터와 GIS(지리정보시스템)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야간 조명(Night lights)' 위성 데이터는 훌륭한 대안 지표입니다. 밤에 불빛이 밝은 곳일수록 경제 활동이 활발하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공식 통계가 없는 지역의 성장을 추적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 남부 해안 지역이 국가 GDP의 35%를 차지하고 외국인 투자의 87.5%를 독식한다는 사실도 이러한 지리적 데이터 분석을 통해 명확히 입증됩니다.
다만, 전문가적 시각에서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야간 조명 데이터는 건물이나 인프라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위치나 실제 노동 생산성을 측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새벽 2시의 조명이 반드시 그 공장의 효율성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술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경제 지도'를 이해하는 데 획기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7. 결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질문
경제 지리학은 단순한 지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고, 선거 제도의 인센티브를 작동시키며, 국가의 정치적 운명을 가르는 핵심 변수입니다. 국경의 의미는 희미해졌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가 주는 경제적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의 선거 제도는 변화하는 경제 지도를 따라잡고 있는가, 아니면 지역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가?"
경제적 지형의 변화와 그에 따른 정치적 인센티브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소외된 장소’의 분노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시 경제 지리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Source: Stephanie J. Rickard, Economic Geography, Politics, and Policy, Annual Review of Political Science, 2020. 23:187–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