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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연구 중심 대학, 존스 홉킨스가 바꾼 세상의 판도
필자 Econ Blog_K의 공개 원문을 허락받아 자동 수집했습니다. 문장과 이미지 순서를 보존하고 지면 폭만 조정했습니다.
이야기하는 사람노해인 · 진행 / 차우진 · 분석

1. 지루했던 대학 교육의 '파괴적 혁신'
19세기 중반, 미국 고등교육 시장은 심각한 '제도적 경로 의존성(Institutional Path Dependency)'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은 라틴어와 그리스어, 수학이라는 고전적 교과과정에 매몰되어 있었으며,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연구'라는 개념은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정체된 환경 속에서 교육의 공급 측면 혁신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다니엘 길먼(Daniel Gilman)입니다. 그는 대학이 단순한 지식의 전수처를 넘어 진리를 탐구하는 '지식의 전초기지'가 되어야 한다는 파괴적 혁신안을 제시하며, 미국 대학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2. 실용보다 고전? 과학을 요구했던 '급진적' 비전
다니엘 길먼이 1872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UC Berkeley) 총장 취임사에서 던진 메시지는 당시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급진적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의 사명이 모든 종류의 예술과 과학을 진보시키는 것이며, 젊은이들을 지적인 소명을 다하는 학자로 양성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고전 중심의 보수적 학풍 속에서 과학 연구를 인문학적 연구와 대등한 위치로 격상시키려 한 시도는 현대 연구 중심 대학의 효시가 되는 중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과학을 더 달라. 결코 적게 주지 마라... 암석, 바다, 토양, 공기, 태양, 별에서 발견되는 진리에 대한 가장 철저하고 지속적인 탐구를 장려하라. 빛과 열, 자기력,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의 신체 구조 속에 있는 진리를 찾게 하라."
3. 버클리의 거절이 낳은 발티모어의 기적
길먼의 웅대한 비전은 버클리에서 정치적 압력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혔습니다. 주 의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를 관철하려 했고, 강력한 농업계 로비 단체는 대학이 학문적 연구보다는 농업과 기계 기술 교육에만 집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길먼은 2년 만에 사임했으나, 이는 오히려 미국 교육사에 있어 '운명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때마침 발티모어에서는 사업가 존스 홉킨스가 남긴 700만 달러라는 유산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기부금은 대학과 병원에 각각 350만 달러씩 배분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이는 전례 없는 거액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자본이 "국가의 간섭이나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족쇄가 없는(No shackles of state or political influence)" 독립적인 토양을 제공했다는 사실입니다. 재단 이사회는 길먼에게 대학의 조직과 운영에 있어 '완벽한 가소성(Entirely plastic)'을 부여했고, 이러한 재정적·운영적 자유가 존스 홉킨스라는 혁신의 산실을 만들었습니다.
4. 독일식 연구와 영국식 학부의 '하이브리드' 모델
존스 홉킨스 대학은 세 가지 요소를 결합한 독특한 '하이브리드' 모델을 정립했습니다. 독일식의 대학원 중심 연구 체계와 영국식 학부 교육을 결합하고, 여기에 미국적인 학문의 자유와 교수-학생 간의 긴밀한 협력 구조를 더한 것입니다. 이는 강의실을 넘어 실험실과 세미나가 교육의 중심이 되는 구조적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연구 중심 대학 모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로를 통해 국가 경제에 기여합니다.
직접적 경제 기여: 대규모 고용과 재화 및 서비스 구매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
인적 자본 형성: 기업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고도의 전문 지식을 갖춘 인재 양성.
생산성 및 혁신 향상: 연구를 통한 신지식 창출 및 혁신적 응용을 통한 산업 전반의 생산성 증대.
다만, 여기서 흥미로운 경제사적 역설이 발견됩니다. 존스 홉킨스의 초기 기초 과학 연구는 메릴랜드 지역 경제에 즉각적인 하이테크 스핀오프(Spillover)를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응용'보다는 '지식 그 자체의 탐구'를 중시했던 길먼과 초기 교수진의 학문적 지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의 확산은 국가적 차원에서 미국이 지식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5. 30대 교수진이 이끈 '박사 학위 공장'
존스 홉킨스의 성공은 단순히 자본의 힘만이 아니었습니다. 길먼은 명성이라는 기회비용을 뒤로하고, 잠재력 있는 젊은 거장들을 파격적으로 영입했습니다. 당시 핵심 교수진 중 실베스터와 길더슬리브 같은 원로 학자도 있었으나, 나머지 교수진은 30대 초반의 젊은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연구하는 학자'를 길러내는 트레이너였습니다. 이들이 배출한 수많은 박사(Ph.D.)들은 미국 전역의 대학으로 퍼져나가 연구 중심 모델을 이식하는 복제자 역할을 했습니다. 스튜어트 레슬리(Stuart Leslie) 교수는 이들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습니다.
"훌륭한 교수진 없이 어떻게 훌륭한 대학을 만들 수 있는가? 또 훌륭한 대학 없이 어떻게 훌륭한 교수진을 얻을 수 있는가? 당신은 이것을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바로 '미래의 훌륭한 교수진'을 조직하는 것이다."
6. 하버드와 예일을 강제로 변화시킨 존스 홉킨스의 위상
초기 하버드 대학의 에리엇 총장은 존스 홉킨스의 독일식 연구 모델을 두고 "고래에게 외양간(barnyard)이 어울리지 않듯 하버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존스 홉킨스 출신 박사들이 미국 명문대 교수진을 장악하며 학술적 헤게모니가 이동하자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하버드와 예일 같은 전통의 강자들도 결국 존스 홉킨스 모델을 벤치마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리엇 총장은 대학 설립 25주년 축사에서 "존스 홉킨스의 사례가 우리 대학을 대학원 교육의 발전으로 이끌었다"며 자신의 과거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항복 선언'과 같은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는 후발 주자의 혁신이 시장 전체의 표준을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 귀결됩니다.
7.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대학의 뿌리
오늘날 미국 연구 중심 대학들이 세계적인 혁신과 경제 성장의 엔진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니엘 길먼이 버클리에서의 실패라는 기회비용을 딛고, 발티모어라는 자유롭고 가소성 있는 환경에서 발휘한 '지적 기업가 정신'의 결과입니다. 존스 홉킨스가 개척한 이 길은 미국이 지식 자본을 바탕으로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하는 든든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근본적인 화두를 던져야 합니다. 과연 오늘날의 대학은 100년 전 길먼이 상상했던 것처럼 여전히 지식의 최전선에서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까? 아니면 과거의 고전 교육이 그랬듯, 또 다른 파괴적 혁신이 필요한 새로운 정체기에 머물러 있습니까?
Source: Karl Rhodes, Founding America's First Research University, Econ Focus FRB of Richmond, Q3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