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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더 평등해질수록 '운'에 더 집착하게 되는 역설적 이유
필자 Econ Blog_K의 공개 원문을 허락받아 자동 수집했습니다. 문장과 이미지 순서를 보존하고 지면 폭만 조정했습니다.
이야기하는 사람노해인 · 진행 / 차우진 · 분석

1. 통제력의 시대와 싹트는 불안
현대 문명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통제력을 선사했습니다. '과학 혁명'은 자연의 신비를 데이터화하여 예측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들였고, '상업 혁명'과 '민주주의 혁명'은 신분이라는 굴레를 벗겨내어 개인에게 자신의 삶을 개척할 자유와 풍요를 안겨주었습니다. 이론적으로 우리는 이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권적 개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기묘한 사회적 역설이 발생합니다. 삶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에, 정작 현대인은 '운(Fortune)'과 '우연'이라는 변수에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며 불안해합니다. 경제적 위기나 사회적 격차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시장이 위험을 공정하게 배분하는지 의심하며, 삶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운명의 수레바퀴'에 휘둘리고 있다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풍요와 자유의 수혜자인 우리가 왜 과거보다 더 '우연'이라는 변수 앞에 전전긍긍하게 되었는지, 그 철학적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2. 평등이 불러온 '공감'의 저주: 타인의 불행이 나의 미래가 될 때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이 타인의 운명에 본능적으로 관심을 갖는 존재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해 타인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해보는 '상상적 식별(Imaginative Identification)'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하고 타인의 행복을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어떤 원리가 본성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 비록 타인의 행복을 보는 즐거움 외에는 얻는 것이 없더라도 말이다." —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공감의 능력이 사회적 '평등'과 만날 때 예기치 못한 심리적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계급 간의 거리는 거의 '종(Species)의 차이'만큼이나 멀었습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이 인용한 세비네 부인(Madame de Sévigné)의 사례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1675년 당시 그녀는 하층민들이 처형당하고 매달리는 비극적인 소식을 딸에게 전하면서도, 곧바로 날씨와 나무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는 냉담함을 보였습니다. 그녀가 악해서가 아니라, 당시 귀족들에게 하층민의 고통은 상상력의 범위를 벗어난 '다른 존재'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상업의 발달로 사회적 거리가 좁아지자 상황은 반전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평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서, 타인의 행운이나 불운은 이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치환됩니다. 타인과 나를 동일시할수록 우연한 기회에 대한 민감도는 증폭되며, 이는 곧 나의 미래를 결정할 '운'에 대한 집착과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3. 철학자와 짐꾼의 차이는 '운'일 뿐인가?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현대의 능력주의(Meritocracy)를 뿌리째 흔드는 통찰을 제시합니다. 그는 지적인 '철학자'와 길거리의 '짐꾼'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격차가 타고난 재능보다는 '분업'과 '교육', 즉 환경적 우연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철학자와 짐꾼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했지만, 성장 과정에서 서로 다른 습관과 관습에 노출되며 그 간극이 벌어졌을 뿐입니다. 여기서 스미스는 날카로운 비판을 덧붙입니다. 철학자가 짐꾼과의 유사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그가 대단한 천재여서가 아니라, 바로 '철학자의 허영심(Vanity of the philosopher)'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성취가 순수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환경적 우연'에 기인한 것이라면, 성공한 자의 오만과 실패한 자의 굴욕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모든 기회가 열려 있다고 믿을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현재 위치가 단지 '운'의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깊은 심리적 타격을 입게 됩니다.
4.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도박판: 토크빌이 본 현대인의 열병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 사회의 역동성이 개인을 '확률 게임(Game of Chance)'의 포로로 만드는 과정을 예리하게 관찰했습니다. 신분적 제약이 사라지고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박판으로 변질됩니다.
"미국인에게 삶은 마치 도박, 혁명, 혹은 전투와 같다." — 알렉시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토크빌은 모든 특권이 사라진 평등한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은 끝없이 팽창하지만, 그 욕망을 실현할 개인의 힘은 미약하다는 사실을 지목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신기루 앞에서 개인은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것'에 끊임없이 집착하며, 이를 토크빌은 "비밀스러운 불안(Secret restlessness)"이라 명명했습니다.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거꾸로 말해 누구든 실패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비교와 지위의 불안정성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합리적 노력이 아닌 '우연한 기류'에 몸을 맡긴 채 표류하는 도박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5. 운을 대하는 두 가지 얼굴: 로버트 프랭크의 이중 가르침
로버트 프랭크(Robert H. Frank, Success and Luck: Good Fortune and the Myth of Meritocracy) 는 이러한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일종의 '전략적 태도'를 제안합니다. 그는 사회적 조화를 위해 대상에 따라 운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공한 자들: 자신의 성취에서 '운'의 역할을 과대평가(Overstate)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겸손을 배우고 공공의 선익에 기여하려는 감사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도전하는 자들: 운보다는 자신의 '노력'과 '재능'의 가치를 믿어야(Understate luck) 합니다. 운의 영향을 너무 크게 인식하면 장애물을 극복할 의지 자체가 꺾이기 때문입니다.
프랭크의 이러한 이분법적 가르침은 평등한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유용한 심리적 기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우리가 성공을 위해 운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왜곡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적 정직성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얼마나 '운'이라는 변수를 직시하기 어려워하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6.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과 체제의 정당성
평등에 대한 열망은 인류를 더 공감 능력 있는 존재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우리 삶을 불확실한 '우연'의 지배 아래 놓이게 했습니다. 사회적 이동성이 활발해지고 타인과 나를 동일시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난 운명의 변수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삶의 모든 결과를 오로지 '운'으로만 치부하려는 경향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성취나 실패가 오로지 운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기 시작할 때, 상업 민주주의 체제의 정당성은 뿌리째 흔들립니다.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고 오직 운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느끼는 순간, 시민들은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지지 철회(Withdrawal of support)'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한 심리적 위축을 넘어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징후입니다.
결국 우리는 다시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모든 것이 운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우리가 평등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의 의지와 책임이라는 가치를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운명을 인정하되 그것에 압도되지 않는 태도야말로, 이 평등한 도박판 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존엄성일 것입니다.
Source: Shelley T. Commerce, Democracy, and Fortune: Smith and Tocqueville on Equality and Chance. Social Philosophy and Policy. 2026;43(1):124-142. doi:10.1017/S0265052526100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