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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라는 환상을 넘어: 한국 재정사로 본 19세기와 20세기의 뜻밖의 연결고리
필자 Econ Blog_K의 공개 원문을 허락받아 자동 수집했습니다. 문장과 이미지 순서를 보존하고 지면 폭만 조정했습니다.
이야기하는 사람노해인 · 진행 / 차우진 · 분석

우리는 흔히 한국 근대사를 '단절'의 역사로 이해하곤 합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가 열리고, 1910년 국권을 상실하며 과거의 유산이 사라진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근대'가 이식되었다고 믿는 것이죠. 하지만 재정(Fiscal)이라는 돋보기를 통해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던 상식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홀리 스테픈스(Holly Stephens)의 연구는 19세기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세 정권이 마주했던 재정적 고충과 대응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근대'라는 화려한 외피 아래 숨겨진, 19세기와 20세기를 잇는 끈질긴 연속성의 실체를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1. "근대성"이라는 이름의 제한된 렌즈가 가린 것들
그동안 역사학계는 '무엇이 근대적인가'라는 질문에 지나치게 몰입해 왔습니다. 자본주의의 부상, 민족주의, 도시화 같은 개념에 들어맞는 사건들만 골라 '근대사'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근대라는 틀에 담기지 않는 수많은 역사적 실체들을 '비근대적' 혹은 '낙후된 것'으로 치부하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근대성(modernity)을 핵심 개념으로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근대적' 삶의 정의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주제들을 소외시킬 위험이 있다."
우리는 19세기를 단순히 쇠퇴하고 무너져가는 시기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소스 텍스트가 지적하듯, 19세기는 이후 전개될 모든 개혁과 변화의 토대였습니다. 이 시기는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세입 징수(Tax collection)'를 하기 위해 어떻게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 세력과 협상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2. 세 정권을 괴롭힌 유령: '폭주하는 지출'이라는 공통의 난제
조선 후기, 대한제국, 그리고 식민지 정부. 이들은 정치적 지향점은 극단적으로 달랐을지언정 모두 '정부 지출의 급증'이라는 거대한 숙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고종과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이라는 거대 프로젝트에 약 1,500만 냥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했습니다. 이는 당시 호조 일 년 수입(약 450만 냥)의 수 배에 달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여기에 이양선의 출몰에 대비한 군비 증강 비용까지 겹치며 재정 압박은 극에 달했습니다.
대한제국: 근대 국가로의 도약을 위해 전기, 전신, 철도 건설과 같은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외교 사절단 파견, 근대적 교육 기관 설립 등 새로운 지출 항목이 쏟아져 나오며 1896년 이후 지출이 세입을 거의 매년 앞질렀습니다.
식민지 시기: 소위 '문화 통치'를 표방하며 사회적 지출이 늘어났고, 산미증식계획과 같은 대규모 경제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 정부 지출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1930년대 전시 동원 체제로 접어들며 지출 규모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3. 세금을 징수하지 못할 때 선택한 '위험한 지름길'
늘어나는 지출을 감당하려면 세금을 더 걷어야 합니다. 하지만 국민과 직접 맞서 '지세(Land tax)'를 올리는 일은 어느 시대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세 정권은 정면승부 대신 다음과 같은 '지름길'을 택했습니다.
화폐 발행(Seigniorage):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은 당백전, 당오전, 백동화를 발행하여 일시적으로 곳간을 채웠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정부는 달랐습니다. 조선은행을 통한 '금 본위제(Yen-standard)' 하에 있었기에 이전 정권들처럼 마음대로 돈을 찍어내는 수법을 쓰기 어려웠고, 이는 식민지 재정의 독특한 제약이 되었습니다.
외채 도입: 대한제국은 해관세(Customs duties)를 담보로 외국 상인이나 은행으로부터 수차례 차관을 도입해 급한 불을 끄곤 했습니다.
자발적 기부: 경복궁 중건 당시의 '원납전(Wŏnnap)'처럼, 정부는 민간의 기부를 독려(혹은 강요)하여 재원을 조달했습니다.
4. 정보와 협상: '중개 국가' 권력의 진화
국가가 세금을 제대로 걷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두 가지는 바로 '정보'와 '협상력'입니다. 누가 어디에 땅을 얼마나 가졌는지(정보)를 알아야 하고, 그들에게 세금을 내라고 설득(협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19세기와 20세기를 잇는 놀라운 기술적 연속성을 발견합니다.
정보의 연속성: 대한제국이 추진했던 토지 조사 사업인 '광무양안(Kwangmu Land Registers)'의 노하우와 데이터는 식민지 시기 '토지조사사업'의 직접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권력의 외주화, 중개인(Brokers): 국가는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중개인'에게 의존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지역의 양반 지배층이 그 역할을 했다면, 식민지 시기에는 '기업적 양조업자'들이 주세를 걷는 중개인이 되었습니다. 국가가 정보를 얻기 위해 특정 이익 집단에게 권한을 빌려주는 '중개 국가'로서의 본질은 시대가 변해도 유지된 것입니다.
5. 식민지 재정의 허구: '재정 자립'의 가면과 비용의 전가
식민지 정부는 겉으로 '재정 자립'과 '근대적 예산'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소스 텍스트(p. 126, 138-139)에 따르면 이는 허구에 불과했습니다. 식민지 정부는 단 한 번도 완전한 재정 자립을 이룬 적이 없으며, 매년 예산의 10~20%를 일본으로부터의 보조금과 차관에 의존했습니다.
더 교묘한 수법은 '재정 전가'였습니다. 중앙 정부는 예산 수치를 관리하기 위해 실제 정책 집행 비용을 지방 정부나 민간으로 떠넘겼습니다.
"중앙 정부는 재정 지출의 부담을 국고에서 지방 정부로 점차 전가했다."
실제로 농업 관련 지출의 약 70%가 지방 예산에서 처리되었으며, 특히 '수리조합(Suri chohap)' 등을 통해 대규모 인프라 구축 비용을 농민들에게 부채의 형태로 떠넘겼습니다. 결국 '근대적 재정'이라는 외관은 농민들의 빚과 지방의 희생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구조였습니다.
결론: 19세기가 20세기에게 건네는 질문
한국의 '근대'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19세기의 재정적 위기와 그 과정에서 시도된 수많은 시행착오, 그리고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정보를 캐내고 중개인과 협상하려 했던 끈질긴 노력들이 20세기 식민지 시기 국가 형성 과정에 깊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국가가 재원을 마련하고 비용을 분담시키는 방식은 19세기의 유산 위에서 변주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과거와의 단절이라는 환상에 빠져,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국가와 개인 사이의 '재정적 협상'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국가가 정보를 통제하고 비용을 교묘히 분담시키는 방식은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 삶의 궤적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작동 원리입니다.
Source: Holly Stephens, Three Reforming Regimes? Modernity and the Fiscal State in Modern Korean History,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32, no. 1 (June 2019): 109–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