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S ORIGINAL · 2026년 8월 12일 · ARCHIVE 224376649442
"여론"만 쫓는 정치가 놓치고 있는 것: '포퓰러리즘'의 함정과 그 너머의 진실
필자 Econ Blog_K의 공개 원문을 허락받아 자동 수집했습니다. 문장과 이미지 순서를 보존하고 지면 폭만 조정했습니다.

오늘날의 정치는 공허하다 못해 투명해지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이제 '무엇이 옳은가'를 묻지 않습니다. 대신 '무엇이 표가 되는가'만을 집요하게 계산합니다. 한때 샌더스 캠프와 '스쿼드(The Squad)' 의원들의 핵심 참모로 활동했던 에반 바커(Evan Barker)의 궤적은 이러한 정치적 공동화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녀는 진보 정치의 내부 기계 장치로 일하며 '좋은 정책'이 '급진적 정체성 정치'에 하이재킹당하는 과정을 목격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팟캐스트 Red Scare와 터커 칼슨의 담론에 휩쓸려 소위 '레드필(redpilled)'을 먹고 2024년 트럼프에게 투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때의 열렬한 활동가가 왜 이토록 극단적인 전향을 선택했을까요? 이는 단순히 개인의 변심이 아닙니다. 승리를 위한 '옵틱스(Optics, 겉보여주기)'에 매몰되어 정작 지켜야 할 문명적 가치와 경제적 실체를 잃어버린 현대 정치의 필연적 붕괴를 예고하는 서막일 뿐입니다.
1. '포퓰러리즘(Popularism)'의 탄생과 전략적 침묵
최근 진보 진영 내 전략가들 사이에서 복음처럼 떠받들어진 개념이 있습니다. 데이터 분석가 데이비드 쇼어(David Shor)가 제안한 '포퓰러리즘(Popularism)'입니다. 이는 일종의 '부드러운 반(反)워키즘 자유주의' 전략입니다. 쇼어는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시위 당시 "폭동이 대중적 지지를 잃게 하여 선거 패배를 초래할 수 있다"는 통계를 인용했다가 해고당하며 이 전략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포퓰러리즘의 골자는 단순하고 냉소적입니다. 대중에게 인기 없는 '부티크(boutique)' 의제들—예를 들어 '임신한 사람(pregnant people)'이라는 기괴한 표현이나 '라틴엑스(Latinx)' 같은 인위적인 용어 사용—을 철저히 숨기라는 것입니다. 2024년 해리스 캠페인이 구체적인 정책 대신 모호한 '말잔치(Word salad)'로 일관했던 것 역시, 비인기적 요소를 소거하여 승리만을 쟁취하려는 포퓰러리즘의 전형적인(비록 서툴렀지만) 실행이었습니다.

2. 여론은 '후행 지표'일 뿐이다: '두 매트(Two Matts)'의 논쟁
하지만 이러한 전략에는 치명적인 철학적 결함이 있습니다. 맷 브루닉(Matt Bruenig)은 맷 이글레시아스(Matt Yglesias)의 포퓰러리즘적 태도를 비판하며, 정치가 단순히 '현재의 중앙값(median)'에 영합하는 기생적 행위로 전락했다고 꼬집습니다. 브루닉의 관점에서 볼 때, 포퓰러리스트들은 사실상 '신념 정치의 기생충'입니다.
그들은 활동가들이 욕을 먹어가며 여론을 바꾸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할 때는 뒤로 물러나 있다가, 그 투쟁의 결과로 여론의 중앙값이 이동하면 그제야 슬그머니 그 자리에 올라타 승리를 전유합니다. 조프 슐렌버거(Geoff Shullenberger)는 이를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요약합니다.
"문화적 토대는 종종 극적으로 변화한다. 오바마 시절 동성 결혼에 대한 여론이 급변했던 사례에서 보듯, 소위 '중도적' 입장이라는 것은 흔히 후행 지표(lagging indicator)에 불과하다."
결국, 승리를 위해 현재의 여론에만 영합하는 정치는 시대를 이끌어갈 '리더십'을 포기하고, 통계 숫자의 뒤꽁무니만 쫓는 공학적 기술로 퇴화할 뿐입니다.
3. '진보적 의제'가 하이재킹 당했을 때 벌어지는 일
에반 바커가 목도한 진보 정치의 비극은 그 지향점이 대중의 보편적 삶에서 멀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독점 금지, 억만장자 과세, 보편적 의료 서비스와 같이 대중적 호소력을 가진 경제 정책들은 어느덧 '급진적 정체성 정치'라는 외피에 하이재킹당했습니다.
정작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더 나은 삶의 질이지만, 정치권은 '라틴엑스' 같은 인위적 용어를 수용하느냐 마느냐의 문화 전쟁에 함몰되었습니다. 실질적인 경제적 정의를 외치던 목소리가 특정 계층의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해주는 문화적 수사로 대체될 때, 정치는 더 이상 평범한 시민들의 도구가 아닌, 엘리트들의 '도덕적 유희'로 전락하게 됩니다.
4. '폐지론'이 인기 없는 진짜 이유: 반(反)문명적 환상
포퓰러리즘의 한계가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지점은 '경찰 및 교도소 폐지론(Abolition)'입니다. 하산 파이커 같은 인물은 폐지론이 단지 '전략적으로 인기가 없어서' 숨겨야 한다고 말하지만, 캐시 프리차드(Cassie Pritchard)의 분석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경고를 던집니다.
공권력의 해체는 폭력의 소멸이 아니라 '폭력의 탈중앙화'를 의미합니다. 국가의 정당한 물리력 독점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린치(lynch)'와 같은 사적인 폭력입니다.
"공권력의 독점에는 억압적 요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권력을 해체하여 폭력을 분산시키는 것에는 더 큰 억압이 도사리고 있다." - 캐시 프리차드
이는 철학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미셸 푸코는 형사 사법 시스템보다 군중의 직접적인 폭력을 선호한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남기기도 했으나,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간파했듯 이는 문명 이전의 야만으로 회귀하자는 주장과 다름없습니다. 폐지론이 인기가 없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표가 안 돼서'가 아니라, 문명을 지탱하는 근간을 부정하는 '반(反)문명적' 아이디어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전략적 승리를 넘어선 '긍정적 비전'의 필요성
정치는 단순히 선거라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옵틱스' 경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의 포퓰러리즘이 빠진 비극은 여론을 추종하느라 정작 여론을 이끌어갈 '긍정적인 비전'을 상실했다는 데 있습니다.
단순히 비인기 정책을 숨기고 중도적인 척하는 것은 정치적 기만이자 리더십의 직무유기입니다. 정치는 여론의 '후행 지표'가 아니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선행 지표'가 되어야 합니다. 공공의 질서와 경제적 정의가 왜 필요한지, 그것이 왜 선한 것인지에 대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실체적인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이기기 위한 정치를 원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문명을 설계하는 정치를 원하는가?" 공허한 옵틱스를 걷어내고 정당한 권위와 정의로운 비전이 다시 정치의 중심에 서야 할 때입니다.
Source: Geopff Shullenberger, The Poverty of Popularism, Compact's Substack, Aug 1, 2026